'종친'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07.11.08 간지표 및 육십갑자 연도적용 일람표
  2. 2007.10.21 정몽주 선생의묘

간지표 및 육십갑자 연도적용 일람표
작성일: 2007-05-23 09:52 | 의견: 0 | 추천: 0 | 조회: 333
간지표

干支

1

2

3

4

5

6

7

8

9

10

11

12

天干
(10)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地支
(12)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천간(天干) -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 [10개]
지지(地支) - 자(쥐), 축(소), 인(호랑이),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 - [12개]
干支(간지) 표기는 天干(천간)이 먼저 표기되고, 地支(지지)가 나중입니다.甲子(갑자), 乙丑(을축)' 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합을 하면 60개가 되고, 마지막이 癸亥(계해)가 됩니다. 이를'六十甲子(육십갑자)'라고 합니다.

육십갑자 연도적용 일람표

◈ 서기 연도와 연결.[아래쪽 간지의 서기 연도는 상단에 준해서 적용. 60년 단위로 ±함]

1. 甲子(갑자)

11. 甲戌(갑술)

21. 甲申(갑신)

31. 甲午(갑오)

41. 甲辰(갑진)

51. 甲寅(갑인)

1504 / 1564
1624 / 1684
1744 / 1804
1864 / 1924
1984년
2044 / 2104

1514 / 1574
1634 / 1694
1754 / 1814
1874 / 1934
1994년
2054 / 2114

1524 / 1584
1644 / 1704
1764 / 1824
1884 / 1944
2004년
2064 / 2124

1534 / 1594
1654 / 1714
1774 / 1834
1894 / 1954
2014년
2074 / 2134

1544 / 1604
1664 / 1724
1784 / 1844
1904 / 1964
2024년
2084 / 2144

1554 / 1614
1674 / 1734
1794 / 1854
1914 / 1974
2034년
2094 / 2154

2. 乙丑(을축)

12. 乙亥(을해)

22. 乙酉(을유)

32. 乙未(을미)

42. 乙巳(을사)

52. 乙卯(을묘)

1925 / 1985

1935 / 1995

1945 / 2005

1955 / 2015

1965 / 2025

1975 / 2035

3. 丙寅(병인)

13. 丙子(병자)

23. 丙戌(병술)

33. 丙申(병신)

43. 丙午(병오)

53. 丙辰(병진)

1926 / 1986

1936 / 1996

1946 / 2006

1956 / 2016

1966 / 2026

1976 / 2036

4. 丁卯(정묘)

14. 丁丑(정축)

24. 丁亥(정해)

34. 丁酉(정유)

44. 丁未(정미)

54. 丁巳(정사)

1927 / 1987

1937 / 1997

1947 / 2007

1957 / 2017

1967 / 2027

1977 / 2037

5. 戊辰(무진)

15. 戊寅(무인)

25. 戊子(무자)

35. 戊戌(무술)

45. 戊申(무신)

55. 戊午(무오)

1928 / 1988

1938 / 1998

1948 / 2008

1958 / 2018

1968 / 2028

1978 / 2038

6. 己巳(기사)

16. 己卯(기묘)

26. 己丑(기축)

36. 己亥(기해)

46. 己酉(기유)

56. 己未(기미)

1929 / 1989

1939 / 1999

1949 / 2009

1959 / 2019

1969 / 2029

1979 / 2039

7. 庚午(경오)

17. 庚辰(경진)

27. 庚寅(경인)

37. 庚子(경자)

47. 庚戌(경술)

57. 庚申(경신)

1930 / 1990

1940 /2000년

1950 / 2010

1960 / 2020

1970 / 2030

1980 / 2040

8. 辛未(신미)

18. 辛巳(신사)

28. 辛卯(신묘)

38. 辛丑(신축)

48. 辛亥(신해)

58. 辛酉(신유)

1931 / 1991

1941 / 2001

1951 / 2011

1961 / 2021

1971 / 2031

1981 / 2041

9. 壬申(임신)

19. 壬午(임오)

29. 壬辰(임진)

39. 壬寅(임인)

49. 壬子(임자)

59. 壬戌(임술)

1932 / 1992

1942 /2002

1952 / 2012

1962 / 2022

1972/ 2032

1982 / 2042

10. 癸酉(계유)

20. 癸未(계미)

30. 癸巳(계사)

40. 癸卯(계묘)

50. 癸丑(계축)

60. 癸亥(계해)

1933 / 1993

1943 / 2003

1953 / 2013

1963 / 2023

1973 / 2033

1983 / 2043

▶ 천간의 '甲'과 지지의 '子'가 결합해서 다음 순서대로 적용되어 '癸亥'까지 60개가 조합되기 때문에 홀수 순서끼리 만나고, 짝수 순서끼리 만나게 됨. 곧, '甲丑'이나 '乙子' 등은 조합될 수 없음.
▶ 간지 표기와 서기 연도의 연결
- 항상 60년 단위로 동일한 간지가 적용됨. [60 배수로 적용됨]
▶ 서기 4년이 갑자년(甲子年)임.
- 곧, 서기 604년, 1204년, 1804년, 2404년 3004년 등 모두 갑자년임
▶ 항상 서기 연도의 끝자리가 4년으로 끝나면 간지의 앞자리가 '갑(甲)'이 됨.
- 계속해서 끝자리 5년은 '乙(을)', 6년은 '丙(병)' ...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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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

정몽주 선생의묘

종친 2007. 10. 21. 07:49

정몽주선생 묘(경기 기념물 1호)written by www.touralone.com

풍수 답산팀에서 김재규 묘에 이어서 두 번째로 찾은 곳이 그 유명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역입니다.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는 손녀사위인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도 함께 있습니다만, 묘역이 정몽주 선생의 묘로 성역화되어 있다보니 안내도를 자세히 안보면 이석형 선생의 묘가 이 곳에 있는지 일반인들은 잘 모를겁니다.

▲ 정몽주 선생의 신도비각▲ 홍살문▲ 재실과 사당 건물 전경

정몽주 선생의 묘역 입구에 서면 좌우로 저 멀리까지 묘역이 조성되어 있어서 상당히 넓다는 느낌입니다. 입구 좌측에는 포은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있으며, 비각 좌측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3기의 비가 서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홍살문이 있고, 조금 안쪽으로는 경모사, 모현당, 영모재라는 사당 건물들이 줄줄이 있습니다.

정몽주 선생의 묘역 입구에 서면 좌우로 저 멀리까지 묘역이 조성되어 있어서 상당히 넓다는 느낌입니다. 입구 좌측에는 포은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있으며, 비각 좌측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3기의 비가 서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홍살문이 있고, 조금 안쪽으로는 경모사, 모현당, 영모재라는 사당 건물들이 줄줄이 있습니다.

묘역으로 오르기 직전 우측에는 연못이 있으며, 연못을 지나면 오른쪽 사초지 위에는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역이 있고,왼쪽 사초지 위에는 정몽주 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 포은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 전경

▲ 포은 묘역의 석물 전경

좌측 계단을 오르면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 오르게 됩니다. 묘역은 굉장히 잘 단장되어 있으며, 봉분은 곡담으로 둘려져 있습니다. 봉분은 왕릉처럼 호석에 난간석까지 둘렀습니다.

봉분 좌우로는 망주석이 서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이 있는데,합장분임을 알려 주듯이 상석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좌측에는 묘비가 서 있는데, 묘비는 정면을 향한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향해 있습니다.

▲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묘비에는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묘역 앞 중앙에는 장명등이 그리고 좌우로는 새로 조성한 문인석이 그 옆에는 옛 문인석이 좌우로 서 있으며, 맨 마지막으로 좌우에 석양을 세워 놓았습니다.

▲ 포은의 묘비와 옛 인석

포은 묘역에서 묘비와 옛 문인석 한 쌍 그리고 새로 조성된 상석에 밀려서 옆에 방치한 듯한 상석이 옛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새로 조성된 것 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풍수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정몽주 선생의 묘역을 보리라 생각을 했습니다만,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서는 저만 사진을 찍느라고 이리 저리 뛰어 다녔지, 발길은 커녕, 눈길 한 번 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포은의 묘는 풍수상으로는 명당이 아닌가 봅니다...

▲ 포은 묘역의 석물 전경▲ 포은 묘역의 곡담 뒤에서 바라 본 전경

※하기의 내용은 인터넷에서 풍수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는 연일(延日) 정씨(鄭氏)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연안(延安) 이씨(李氏)인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선생의 묘가 나란히 있다. 이석형이 정몽주의 증손녀(曾孫女) 사위라고는 하지만 가문(家門)이 다른 두 사람의 묘가 한 곳에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의 간곡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절개를 저버리지 않은 정몽주를 이방원은 그의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에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고려의 충신을 살해하고도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저자 거리에 내다 버리고 시신을 치우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송악산 스님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만들어 주었는데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권력 장악에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자식들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선덕왕후 강씨의 소생 방번과 방석이 죽자 고향 함흥으로 가 칩거하면서 노여움에 치를 떨었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그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권강화와 흩어진 민심수습에 나섰다.

그는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충성심을 신하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충절을 지킨 정몽주를 복권시키기로 했다.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에 이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가 뒤따르는 가운데 상여가 고향 영천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읍을 지날 때였다. 상여 행렬의 맨 앞에 선 명정(銘旌)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정을 잡기 위해 따라가보니 지금의 이석형 묘가 있는 자리에 떨어졌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구나" 감탄하면서 경북 영천까지 갈 필요 없이 이 곳에다 안장하기로 하고 광중을 팠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하관은 할 수가 없었다. 몇몇 인부들에게 광중을 지키도록 하고 먼 행렬에 피곤한 후손들과 유림의 제자들은 곤한 잠이 들었는데 한 사람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몽주의 증손녀였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집 보다는 시댁과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서 자리에 욕심을 냈다. 정씨 부인은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묘 아래에 있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밤새 부었다. 다음날 정몽주 선생을 모시려고 보니 광중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명당인 줄 알았더니 물이 나는구나"하고 탄식하면서 옆 언덕을 보니 그곳도 명당인지라 정몽주 선생을 그 곳에다 모시었다. 따라서 정몽주 선생의 묘와 이석형의 묘 자리가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훗날 부인 연일 정씨가 임종에 이르렀을 때 자손에 유언하면서 말하기를,"너희 아버지가 묻힌 곳에 합장하라.그러면 우리 연안이씨 집안에는 대대로 복록이 끊이질 않을 것이다" 하였다.이같은 일이 있은 뒤로는 명당 덕인지 연안 이씨 가문이 번창하였다.월사 이정구(李廷龜)를 비롯한 여러 인물이 조선조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것도 사실이다.반면에 연일 정씨 집안에서는 조선조에 이렇다 할 인재가 별반 없었다.

이와 같은 일화가 말해주듯이 포은 선생의 묘보다는 저헌 선생의 묘가 더 큰 혈(穴)임에는 틀림없다. 용혈을 보아도 그렇지만 포은의 후손보다는 저헌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였다. 광산 김씨(光山 金氏) 달성 서씨(達城 徐氏)와 함께 조선의 삼대 명문 중의 하나가 연안 이씨(延安 李氏)이며 이석형의 후손들이다.

▲ 사람이 모인 곳은 이석형 선생의 묘입니다.▲ 포은 묘역 뒷편에서 바라 본 전경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정몽주 선생과 관련된 다른 곳에 있는 유물은...

보물1110호인인조기사모본 정몽주 영정(仁祖己巳摹本鄭夢周影幀)-경북영천시(국립 경주박물관 보관)

고려시대 충신 정몽주(1337∼1392)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98㎝, 세로 169.5㎝이다. 정몽주의 호는 포은으로 고려말 혼란기에 정승에 올랐으며, 이성계 추대에 반대하다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단심가’는 고려에 대한 그의 충절이 담겨져 있다.

이 초상화는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있는 3점의 정몽주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숭정기사모본’이라 쓰여 있는 것이다.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엷은 청색의 관복을 입고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옷주름 표현은 청색선을 이용하여 묘사하였으며 돗자리나 배경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 초상화는 인조 7년(1629)에 김육이 비단 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으로, 비단이 많이 헐어 훼손이 심한 상태이나 옛 그림화풍이 잘 나타나 있으며 3점의 포은 초상화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중요한 작품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272호인 포은 정몽주 유허비(圃隱 鄭夢周 遺墟碑) - 경북 영천시임고면 우항리 1044-5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다. 공민왕 5년(1355) 부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서 3년상을 치르고, 그후 공민왕 14년(1365) 모친상까지 당하여 역시 3년상을 지내였다. 이토록 지극하였던 그의 효성이 조정에 보고 되자, 출생지인 이곳 우항리 마을에 비를 세워두도록 하였다.

비는 반듯하고 널찍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앞면에는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의 ‘효자리(孝子里)’라는 글귀를 세로로 큼직하게 새겼다. 공양왕 원년(1389)에 세운 것으로, 그후 잃어버렸던 것을 조선 성종 18년(1487) 땅속에서 찾아내어 비각을 세워 모시고 있다.

정몽주선생 묘역안내도

정몽주선생 묘역위치도

소재지 : 경기용인시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

빨간 깃발이 있는 곳에 정몽주선생 묘와 이석형 선생의 묘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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