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代습명(襲明):형양공은 영일정씨의 시조이다. 휘(諱)는 습명(襲明)이고 호(號)는 동하(東河)이며 형양에 봉하였다. 출생에 대해서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나 그 행적을 미루어 고찰해보면 고려 숙종조(肅宗朝) 초기로 여겨진다. 공(公)은 성품이 청렴강직하고 지·인·용(智·仁·勇)을 겸비한 거유(巨儒)로서 예종(睿宗)·인종(仁宗)·의종(毅宗) 3대왕조의 중신(重臣)으로 문명과 공덕을 높이 떨친 명신이었다. 영일 오천서원에 향사(享祀)되어 있다.

일찍이 학문에 능숙하여 예종조(睿宗朝)때 향공 문과(鄕貢 文科)에 급제하였다. 1116년〔고려 예종(睿宗)11년〕에 약관의 나이로 서경도사(西京都事)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소명되어 내시(內侍)가 되었다. 1135년〔고려인종(仁宗)13년〕에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키니 내시지후(內侍祗侯)가 되어 부사(副使) 허순(許純), 서령(暑令), 왕식(王軾)등과 함께 황해도에 나가서 순화현 남강에서 적의 진로를 봉쇄하였다. 1136년(고려 인종 14년)에 묘청의 난이 평정된 후 국자감사업(國子監司業)과 기거주(起居注), 지제고(知制誥) 등을 겸임하였다.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는 김부식, 김충효와 함께 50권의『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1146년(고려 인종 24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옮기고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어『서경(書經)』의「대우모편(大禹謨篇」을 강론하였다. 仁宗은 항상 직간(直諫)하는 형양공의 충성심에 감격하고 넓은 도량을 중히 여겨서 승선(承宣)에 발탁하고 겸하여 동궁(東宮:황태자)의 태자의 스승으로서 부족한 태자의 장래를 영원히 보호해 주도록 당부하였으며 또한 仁宗은 임종시에 형양공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제수 하였다. 1149년〔고려 의종(毅宗) 3년〕4월에 공에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제수하였다. 당시 조야에 공을 시기하여 임금에게 무고를 일삼는 무리들이 있어 의종은 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폐신(嬖臣:임금에게 아부해서 신임을 받는 신하) 김존중(金存中)등의 참소가 이어져 영일현(迎日縣) 오천(烏川)으로 정향유배(定鄕流配)되었다. 적소(謫所)에 이르러 공은 임금의 뜻을 헤아려 알고 약을 마시고 일생을 마쳤다.

특히 시문에 특출하여 석중화(石竹花, 매랭이꽃)등이 유명하며 묘단은 포항시 오천읍 대송면 남성리에 있으며 종당(宗堂)에는 남성제단 현판이 있고 매년 4월첫째 일요일에 제례향사가 있다.

2代섭균(燮均):위위 주부동정.

3代겸목(謙牧):내시 주부동정.

4代인신(麟信):태학박사, 봉위동정.

차연(次延):사재 주부.

5代 지태(之泰):전서, 주부동정. 배위는 기계군부인 기계윤씨.

사보(師保): 주부 동정.

6代 종흥(宗興):진현관 제학,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 배위는 진씨.

화룡(化龍):직장

7代 임(林): 봉익대부, 판도판서. 배위는 의창박씨.

호(浩): 보승낭장.

기(琦): 군기감

8代 인수(仁壽):검교 군기감, 증 봉익대부 개성윤 상호군.

인언(仁彦):1315년 출생,봉익대부 전공판서. 배위는 오천군부인 영일정씨

준(俊):진전직.

숙첨(淑瞻):보승중랑장.

9代 유(裕):직장동정, 증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 배위는 곡산연씨.

광후(光厚):가선대부 공조판서. 묘소는 영천에서 동쪽으로 20리 원당리 묘좌(卯坐). 배위는 익양군부인 영천이씨.

원후(元厚):한성윤

신필(臣弼):영동정.

곡(谷):사온서 직장.

10代 운관(云瓘):공의 휘(諱)는 운관(云瓘)으로 시조 형양선생의 10대이며, 포은선생의 선고이시다. 시례(詩禮)의 가문에서 태어나 학문에 힘써 향공(鄕貢)에 과거(科擧) 성균관의 응복재생(膺服齋生)이 되더니 뒷날에 장자 포은선생의 귀(貴)로 신덕수의(愼德守義) 성근익공신(誠勤翊功臣)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판병조사상호군(判兵曹事上護軍) 영경영전사(領景靈殿事)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에 증(贈)하였으며 배위(配位) 永川李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으며, 운관공(云瓘公)은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正月에 돌아 가셨고 배위인 李씨는 1365년에 돌아가셨다.

公의 세대가 이미 650년이 지나 산천이 여러번 변하여 문헌이 산일(散逸)되어 그 행적을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송경지(松京誌)에 보면 그 부인李씨가 포은선생의 어릴적에 '계세훈' (戒世訓)을 지은「백로가」야 말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그 비중이 버금가니 가히 부인의 인품을 알수 있다.

公의 분묘(墳墓)는 임란병화(壬亂兵火)로 허물어졌다가 중세(中世)에 본군 군수(郡守) 한덕(韓德)이 각석표음(刻石表陰)하고 후에 현감 운한(雲翰)과병사 익(兵使 榏)이 개갈(改碣)하고 근세에 이르러 다시 대갈(大碣)을 갖추었다.

묘위치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서원골) 산31-1번지이며 2006년 묘역을 재정비하였다. 묘제는 음력 2월 8일 中丁일에 봉향하고 재실은 계현재(啓賢齋)라 한다.

11代 몽주(夢周):

선생께서는 1337년(고려 충숙왕 6년) 음력 12월 22일 경상도에서 태어나 성장하셨으며, 1392년 (고려 공양 왕 4년) 음력 4월 4일 56세로 선죽교에서 순절할 때까지, 문무를 겸비한 만고의 충신이었으며, 뛰어난 성리학자이자 시인이었다.

초명(初名)은 몽란(夢蘭)·몽룡(夢龍)이고 세 번째 이름이 몽주(夢周)이시다. 자(字)는 달가(達可)요 호(號)는 포은(圃隱)이시다. 본관(本貫)은 영일(迎日)이고 고려 18대 의종(毅宗)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11대이며, 정운관(鄭云瓘:日城府院君)의 맏아드님이시다.

1357년(고려 공민왕 6년) 감시(監試)에 합격한 뒤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修撰)벼슬 등을 거쳐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 兼 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 벼슬을 역임한 후 이해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인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女眞族)의 토벌에 참가하였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겸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 등을 역임하시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 兼 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바다에 빠져 13일 동안이나 사선(死線)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출선에 구조되어 귀국하였다.

1376년(우왕 2년)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적극 반대하다 경상도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수(日本 九州)의 지방장관 이마가와(今川了俊)에게 가서 왜구(倭寇)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받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외교 수완을 보였다. 우산기상시·보문각제학·지제교(右散騎常侍·寶文閣提學·知製敎)를 거쳐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典工判書·進賢館提學), 예의판서·예문관제학(禮儀判書·藝文館提學), 전법판서(典法判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도벌에 참전하고 이어 밀직부사·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입국거부로 요동(遼東)에서 돌아왔고, 1383년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 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처들어온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8년 삼사좌사(三司左使), 문하찬성사·지서연사(門下贊成事·知書筵事)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고, 1390년 벽상삼한 삼중대광·수문하시중·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영경령전사·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 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가서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서 치료받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太宗)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게 되자 포은선생께서는 이성계의 문병차 찾아갔다가 귀가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심복(心腹)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철퇴를 맞고 순절(殉節)하셨다. 이 날이 1392년 음력 4월 4일이며 포은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7개월만에 475년동안이나 지켜오던 고려는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섰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불교(佛敎)의 폐해을 없애기 위해 유학(儒學)을 보급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되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여 개성(開城)에 5부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이고 말았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이외에 한시(漢詩) 312편이 전하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사람으로 1401년(太宗 1년) 영의정에 추증(追贈),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중종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충렬서원(忠烈書院), 경북 오천의 오천서원(烏川書院), 경북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강원도 강릉의 전충사(全忠祠) 등 전국 34개 서원 및 사당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포은선생의 묘소는 선죽교에서 순절된지 14년만에 고향인 경상도로 천장(遷葬)하기 위해 가는 도중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안장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개성 풍덕에서 오셨다하여 풍덕래라는 지명이 지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배위는 경순택주 경주이씨.12월 12일에 졸하셨고 묘부좌이다. 제향은 음력 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음력 10월1일 시향제가 있다.

과(過):예조판서(무후)

후(厚): (무후)

도(蹈):사재령

12代 종성(宗誠):원사공의 휘(諱)는 종성(宗誠)이고 포은선생의 장자(長子)로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에 태어났다. 조선이 개창되고 난 후 公의 나이 28세에 乙·丙科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가 있어 公에게 명소(命召)가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公의 나이 35세(1408년)에 분산낭자(分散狼藉)한 선고(先考) 포은선생의 유고(遺稿)를 문인(門人)과 친지 제사(諸士)를 통하여 수년간 수집하여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호정(浩亭) 하륜(河崙)에게 시문집의 서문을 청하였다. 그 후 36세(1409년)에 두 번째로 시문집 서문을 선고의 문인인 예문관제학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에게 청하였다. 公은 태종대왕, 세종대왕대에 걸쳐 수차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64세(1437년)에 성군(聖君)의 명소(命召)를 끝내 고사(固辭)치 못하고 후은막중지의(厚恩莫重之義)로 경갑노경(經甲老境)에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취임하였다. 이 해에 산실(散失)한 포은선생의 원고 약간편을 더 수집하여 선생의 문인인 숭정대부이조판서 수문전 대제학 운봉 박신(朴信)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公의 나이 69세(1442년)에 사직을 청하였으나 세종대왕은 윤허치 않고 6개월 뒤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직(昇職) 전임(轉任)하였다. 公은 여말(麗末)에 아홉효자의 한 사람으로『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標榜錄)』에 선록(選錄)되었다.

12대

종본(宗本):사예공의 휘(諱)는 종본(宗本)이고 포은선생의 차자(次子)로 1377년(우왕 3년)에 출생하였다. 公의 나이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2세와 33세 때에는 公의 형 원사공과 함께 포은선생의 원고를 모아 하륜(河崙)과 변계량(卞季良)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1419년(세종 즉위년)43세 되던 해 8월에는 좌헌납(左獻納)에 취임(就任)하였다가 다음달에 파직하였다. 50세 되던 1426년(세종8년)에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임하였다. 54세 되던 1430년(세종12년)에 중부교수관(中部敎授官)으로 세제(稅制)에 참의(參議)하였다. 55세 때인 1431년(세종 13년)에 중부교수관으로 학제(學制)·인재등용(人材登用)에 관해 상서문(上書文)을 올렸다.(『세종실록』권51, 13년 辛亥 3월)

1437년(세종 19년)에는 곡산군수(谷山郡守)에 부임하였다. 이 해에 포은선고의 유고를 더 수집하여 박신(朴信)에게서문을 청하였다. 마지막 기록으로는 84세 때인 1460년(세조 5년)에 성균사예(成均司藝)로서 병록원종삼등공신(竝錄原從三等功臣)으로 전지(傳旨) 받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 산 121번지 경좌(庚坐), 배위는 증 숙부인 경주이씨. 묘부(墓祔)

13代 보(保):설곡공의 휘(諱)는 보(保)요 호(號)는 설곡(雪谷)이며 중추원사 종성(宗誠)의 사자(嗣子)이고 포은선생의 장손(長孫)이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이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조선 문신으로 학문이 뛰어나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456년(세조 2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한 말이 세조에게 알려져 처형(處刑)의 명이 내려졌으나, 정몽주(鄭夢周)선생의 손자임이 밝혀져 사형에서 감형하여 영일(迎日)에 유배(流配) 되었다가 후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丹城)으로 옮기어 이때에 단종이 승하(昇遐) 하시니 복상(服喪) 3년하고 단성 적소(謫所)에서 작고하셨다. 1703년(숙종29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1731년 영월 8현사, 1791년 용인 충렬서원, 진주 옥산서원에 각각 배향되었으며, 1982년 9월에는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승무(陞廡) 배향(配享)하였다. 1905년에는 자헌대부 내부대신(資憲大夫內部大臣)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포은선생 묘소 우측에 정경부인밀양박씨(貞敬夫人密陽朴氏)와 合封되어 있다.

수(脩):중추원사 종성(宗誠)의 차자, 선무랑, 사헌부감찰. 묘소는 양주군 남5리 녹양역 북월강 남방리 미좌(未坐). 배위는 청주정씨.

순(恂):사예공 종본(宗本)의 장자. 생원, 계공랑, 의영고직장. 배위는 강릉김씨. 계배위는 양성이씨 1415년생 향년 83세로 1497.7.13일졸, 묘소는 진주에서 동쪽으로 5리 비봉산아래 저동후곡 건좌(乾坐),표음 있음.

관(慣):사예공 종본(宗本)의 차자. 관직은 사과. 묘소는 사예공 묘에서 우측으로 20보 건좌(乾坐), 배위는 남평문씨, 묘부좌.

신(愼):사예공 종본(宗本)의 三자, 관직은 사정. 묘소는 진주 저동, 배위는 진주강씨

14代 여경(餘慶):가각녹사(架閣錄事). 석로 중랑장의 장자(무후)

윤정(允貞):설곡공 보(保)의 장자. 진사, 봉훈랑 장흥고주부. 묘소는 포은선생 묘 우측장록내 제6강(180보) 축좌(丑坐), 내광 간좌(艮坐), 계배 원씨와 합폄, 표석이 있고 지문은 10대손 관제 종친이 기록함. 배위는 한양조씨 4월 19일졸. 계배위는 원주원씨. 12월 6일졸 묘부좌 축좌(丑坐)였으나 2002년 3월 한양조씨 이장 합폄하여 현재는 3위를 합폄하였다.

윤관(允寬):설곡공 보(保)의 三자, 1433년생, 1453년 사마 양시 급제, 향년 76세로 1508년 12월 6일 졸.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묘소는 단성에서 동쪽으로 10리 오리동 비진 자좌(子坐) 쌍분 표석 있음. 배위는 증 숙부인 파평윤씨. 1443년생, 향년72세로 1514.7.1일졸, 묘소 부좌.

인충(仁忠):사예공 종본(宗本)의 장손, 통훈대부 흡곡현감. 배위는 고씨. 묘소는 고양.

예충(禮忠):사예공 종본(宗本)의 손자, 예조참판.

의충(義忠):사과공 관(慣)의 자, 관직은 사직. 묘소는 울진 석현 간좌(艮坐). 배위는 공인장씨 묘부 동원.

지충(智忠):도암공, 처음 휘는 원충(元忠), 자는 덕원, 호는 도암, 1441.7.2일생. 충순위, 향년 70세로 1510.11.3일 졸,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 묘소는 진주에서 북쪽으로 20리 집현산하 용산보통동 임좌(壬坐), 표석 있음. 배위는 증 정경부인 철원황씨 1525.10.11일졸, 묘소는 공묘좌강 끝 임좌(壬坐), 산아래 집현재 있음

15代 희(熹):설곡공 보(保)의 장손, 1412.3.12일생. 통훈대부 사헌부감찰,1474.10.22일졸. 증 통례원 좌통례 후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묘소는 아버지 윤정(允貞) 묘 좌변 위 22보 계좌(癸坐) 쌍분. 배위는 증 정부인 죽산박씨. 11.20일졸 묘부좌.

견(堅):설곡공의 三자 참의공 윤관(允寬)의 장자. 자는 가고, 1461년생 향년 87세로 1547.2.16일졸 관직은 사용,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묘소는 참의공 묘 계단아래 자좌(子坐), 배위는 증 정부인 남평문씨. 1509.2.26일졸 묘소는 진주에서 동쪽으로 10리 저동 임좌(壬坐), 표석 있음.

증(增):참의공 윤관(允寬)의 三자, 자는 언겸. 무과 병사우후,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묘소는 협천에서 남쪽으로 20리 사내곡 경좌(庚坐), 배위는 증 정부인 강양이씨. 묘소는 공묘위 20보 경좌(庚坐)

균(均):참의공 윤관(允寬)의 四자, 1470년생 사직, 11월 3일졸, 배위는 진주강씨.

인창(仁昌):감찰공 수(脩)의 장손, 통정대부 사헌부감찰, 묘소는 백천에서 서북쪽으로 30리 점추동 자좌(子坐) 상하분, 배위는 평산신씨. 묘 부상(祔上).

문창(文昌):감찰공 수(脩)의 손자, 첨중검 , 증찬성. 배위는 증 정경부인 무송윤씨.

제(濟):사과공 관(慣)의 장손, 사헌부감찰. 묘소는 정평군 장원면 사수리 함가동 간좌(艮坐), 합폄, 표석 있음.배위는 숙인 진주류씨.

도(渡):사과공 관(慣)의 손자, 자는 귀종, 관직은 의흥위사맹. 묘소는 삼척 새운 용산 자좌(子坐), 배위는 공인 강릉김씨.

숙(淑):도암공 지충(智忠)의 三자, 관직은 사과, 1. 3일 졸. 묘소는 아버지 지충(智忠)묘 아래 임좌(壬坐). 배위는 정씨, 11.3일졸, 묘소는 진주에서 남쪽으로 15리 정촌모정치 건좌(乾坐).

諱 (光韶)系(신유보1권110∼114, 581∼870)

16代 광소(光韶):도암공 지충(智忠)의 손자, 자, 호, 출생연대는 미상, 관직은 참봉, 5.18일졸 묘소는 진주에서 동쪽으로 5리 허마치 신지동 유좌(酉坐) 합폄. 배위는 최씨 8.5일졸 묘부(墓祔).

17代 성구(誠龜):첨지.

상구(祥龜): 증 공조참판, 정미(丁未) 10.19生, 신해(辛亥) 5.7卒, 묘소는 정촌서제동죽록건좌(乾坐), 배위는 밀양 박씨, 임술년 3.19卒 묘부(墓祔).

총구(總龜)

18代 계원(繼元):첨지.

선원(繕元):수직 부호군.신미년 8.18生, 경인년 4.2 卒, 묘소는 진주남가차례어아동 癸坐,

배위는 진주하씨, 경인년 11.23卒 묘부(墓祔).

19代 의(의) : 묘소는문산면 옥산리 정촌 祖墓(상구)아래 乾坐, 배위는 진주 정씨

20代 시(시) : 효종 계사년 9.16생, 병신년 무과(武科), 정미년 8.17卒 묘소는 산청읍

범학리뒷산 丑坐 ,배위는 김해 김씨

21代 문희(文熙): 숙종 무오生, 11.8 卒 묘소는비 김씨묘下, 배위는 해주최씨

22代 보(보)

22代 옥():수직 통정대부.5.9卒 묘소는 강릉군 왕산면 도마리 삼성둔지 酉坐 배위는 숙부인

진주강씨 12.19졸 묘부(墓祔).

23代 충광(忠光)

23代 충전(忠傳): 2.6生, 1.26卒 묘소는 횡성군 정곡면 죽림동, 배위는 안동김씨

23代 충잉(忠仍)

24代 의제(義濟)

24代 운제(雲濟) : 영조 갑오년 11.17生, 신유년 1.3卒, 묘소는 횡성군 정곡면 죽림동 父墓下, 배위는 강릉최씨

24代 래제(來濟)

24代 경제(經濟)

24대 형제(衡濟)

24代 희제(熙濟)

25代 종채(琮采) :

26代환용(煥龍)

27代 원기(元基)

27代 형기(亨基):수직 통정대부.

28代 중용(仲鎔):

29代 윤영(允永):

30代 동화(東和)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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