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아 알게 되실 거요. 반드시 세계적 규모의 농장을 만들 작정이니깐”. 자기만이 농촌을 다시 일으킬 수 있으며, 그 작물은 오갈피밖에 없다는 투다. 스스로도 “이만한 허풍이 없을지 모른다”면서 은근히 반응을 떠보는 눈치다. 기자의 심술기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래도 허풍은 또 이어졌다. “농장을 몇년 안에 1억평 규모로 넓힐 것”이라는 장담이 스스럼없다. 아니, 1억평이라니….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일궜던 서산 간척지(4천7백만평)의 2배가 넘는 규모. 모두 합쳐서 50억평 남짓한 국내 논밭의 2% 정도를 자기 밭으로 만들겠다는 계산이 어떻게 가당하단 말인가. 마치 ‘봉이 김선달’과 얘기를 주고받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만큼 재배해서 팔릴지는 둘째 치고라도 그토록 넓은 땅을 조달할 능력이 있느냐”고. 기자 나름으로는 멋쩍은 모습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빙그레 웃어넘긴다. 그런 질문을 적잖게 들었다는 표정이다. “내가 국세청 출신으로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다음으로 부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고 태연하게 되묻는다. 자기 땅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는 얘기다. 이쯤 돼서는 기자가 일단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흙먼지 묻은 낡은 양복 차림과 검게 그을은 첫인상만으로 가볍게 생각했다가 임자를 제대로 만난 셈이었다.
물론 자신의 땅이 그만큼 넓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농산물 수입개방 탓에 버려진 농지가 여기저기 수두룩하므로 땅을 얻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라고 했다. 밭 임대료가 4년 전보다 절반으로 떨어졌으며, 이런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단순히 땅과 하늘만 쳐다보는 농사꾼은 아니었다. 몇마디에도 사업가적인 기질이 느껴졌다. 현재 그의 농장은 천안 수신면 만경산 일대를 비롯해 안동·영주·봉화·양구 등 전국 20여 군데에 퍼져 있다. “모두 1백95만평 규모에 줄잡아 8백만 그루가 재배되고 있다”고 밝혔다.
도대체 오갈피가 얼마나 좋기에 그런 엄청난 뜻을 세웠는지 궁금했다. 그는 각종 관련서적과 생약학회, 식약청의 발표 자료를 주루룩 펼쳐놓더니 바짝 다가앉았다. 한반도·시베리아·만주 등 동북아 일대에 자생하는 낙엽성 활엽수. 강장진통 효과를 지녀 신경통·관절염·타박상에는 물론 고혈압과 건만증에도 두루 통한다니, 그야말로 만병통치다. “한줌의 오갈피가 마차에 가득한 보물보다 값지다고 했으며, 생활에 다섯가지를 보태준다고 해서 ‘오가피(五加皮)’라고 불리는 게 아니냐”고 했다.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의 구절도 줄줄이 끄집어냈다.
오갈피 종류도 여러가지. 가시오갈피·섬오갈피·흰털오갈피 등 세계적으로 인정된 것만 해도 20종 가까이 이른다. 그는 인삼이 오갈피과에 속하는 사실을 들며 다섯잎이 돋는데다 생김새도 서로 비슷함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인삼 만큼 약효가 좋다는 뜻이냐”고 한마디 거들었더니 도리어 “어림없는 소리”라며 눈을 흘겨뜬다. 반대로 오갈피의 약효가 훨씬 뛰어나다는 표정이다. 그는 지난 68년 옛소련 과학아카데미 연구팀이 오갈피와 인삼의 효능을 견주어 발표한 연구보고서를 인용하며 오갈피의 효능을 강조했으나, 그 부분은 일단 전문가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자.
“어쨌든 오갈피에 대한 관심이 외국에서 더 높다”니 뜻밖이다. 오갈피가 암이나 에이즈 치료에 함께 사용됨으로써 방사선 부작용과 치료제의 독성을 줄였으며, 미국에서도 우주식품 첨가제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그가 아쉽게 여기는 것은 세계시장에서 오갈피가 이처럼 약재, 화장품 원료로 두루 쓰이지만 국내에서는 건강식품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는 점. “섬오갈피의 소염진통 효과가 아스피린·모르핀보다 뛰어나면서 위장장애나 습관성이 없다”면서 “이를 제대로 상품화한다면 연간 1천억달러에 이르는 세계 소염진통제 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가 오갈피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당뇨를 앓던 형님이 오갈피로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동생으로서 이런저런 약을 대다가 산삼을 구하러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오갈피 뿌리를 캐어 달여먹인 결과였다. 이미 30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의 끈질긴 집착을 보여준다. “그때도 이미 민간의학에서 최고의 영약으로 알려져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약초 수집상이나 심마니를 통해 한두 그루씩 모으기 시작했다”며 초창기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는 무엇보다 스스로 농사꾼임을 앞세운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아무리 오갈피라도 정직하게 짓지 않으면 소출을 거두지 못한다는 뜻일 것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날씨·토양·품종을 덧붙여 계산한다. 이른바 ‘예술품 작물’을 만들어내려면 무작정 땅만 갈아엎어서는 어렵다는 얘기다. 오갈피를 옮겨심기에 앞서 토지개량을 위해 심어두는 고구마 경작과 배나무 재배에서 당도를 높이고 크기를 키워 이미 그것을 증명했다. 제초제를 치지 않으면서 뿌리가 깊이 뻗어내리는 호밀을 밭고랑에 심어 자연적으로 유기질을 공급시킨 결과다.
밭을 가꾸는 일 말고도 그에게는 관심거리가 적지 않다. 세계적 명견을 만든다는 뜻에서 ‘통일견’을 키우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남쪽 진돗개와 북쪽 풍산개 사이에 얻은 새끼들이다. 농장 한쪽에 마련된 사육장에서는 200여 마리의 통일견이 자라고 있다. 농장과는 별도로 한방병원과 민속촌을 세운다는 거창한 계획도 마련해 놓았다. “벌써 당국의 허가를 받아 지금까지 작업을 미뤄왔으나 내년에는 정식으로 착공하게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민속촌 부지로 잡아놓은 면적만 해도 60만여평에 이른다.
그가 까치잡이 기구를 고안해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까치가 제법 영악한 탓에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졌다. 큰 새장의 형태를 갖췄지만 푹 내려앉은 천장 가운데 부분에 알루미늄 파이프들이 10㎝ 간격으로 쳐져 있다. 까치가 이 사이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긴 해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설계됐다. 날아서 다시 빠져나가기에는 이 틈새가 너무 좁은 셈이다. “까치가 극성을 부리는 것은 농약을 잔뜩 뿌려 메뚜기, 개구리 같은 먹이를 없앤 사람들의 책임도 크다”며 한편으로는 편치 않은 기색이다. 요즘 까치들이 한창 새끼치는 무렵을 맞아 그의 머리는 더욱 착잡한 것 같다.
젊었던 시절의 고생담을 부탁했다. 충남 연기 출생. 대전고 졸업. 그러나 너나없이 빈한하던 시절이 아니던가. 서울농대에 입학했다가 학비 때문에 도중에 그만두고 군에 입대한 것도 그런 때문이었다. “이래봬도 다섯 형제 가운데 네명이 서울대 문턱을 밟았다”며 자랑이 은근하다. 제대 직후 무작정 상경해 봉천동의 어느 목장에서 낮에는 소를 돌보고 밤중에는 공무원 시험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서울시, 국세청을 비롯해 시험에 응시한 열몇군데 직장에 줄줄이 합격했다. “국세청에서 7년인가 근무하다가 내 길을 찾아 그만뒀다”며 당시 국토개발의 열기 속에서 부동산 투자로 한몫 단단이 챙겼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술술 뚫린 것은 아니었다. 애써 공들인 땅이 수용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 군대에 어렵게 고추를 납품하고 김치공장에까지 손대는 등 다시 일어나기까지의 파란만장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천안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몇년 뒤 근처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섬으로써 재산이 갑자기 늘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뜻밖의 수난도 겪었다. “젊었을 때는 돈의 유혹을 버리지 못했으나 오갈피를 만나고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뒤를 돌아본다”는 얘기가 허튼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덴마크 농촌을 일으켰던 달가스, 그룬투비히를 거론하기도 했다.
새벽 3~4시쯤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는 그다. 남의 목장 일을 돌보던 젊은 시절부터 몸에 밴 한결같은 습관이다. 농장 한쪽에 마련된 염소 우리와 건조장, 새로 들어서는 양조시설을 돌아보는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요즘은 근처 성환에서 버섯을 가꾸는 구자경 LG명예회장에게 전달할 ‘까치 생포기’를 추가로 만드느라 바쁘다”며 그는 활짝 웃어보였다.
〈gracias@kyunghyang.com〉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색다른 견학 코스 (0) | 2010.08.10 |
---|---|
까치와의 전쟁 이젠 승리만 남아 (0) | 2010.08.10 |
성광수 장로 가족 (0) | 2010.08.10 |
성광수식 농사법이란 (0) | 2010.08.10 |
`토종 오가피가 산삼보다 낫지요` (0) | 2010.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