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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야만 했던 유리명왕
유리명왕이 이궁(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집)을 두어야 할 정도로 힘이 강하였던 골천세력의 딸 화희는, 유리명왕이 사랑하는 미미한 한족 집안 출신 후처 치희를 질투하여 모욕을 주게 되고, 결국 차희는 친정으로 도망하게 된다. 자신의 왕권 유지에 기반이 되는 골천 세력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유리명왕으로서는 떠나는 차희를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야만 했던 유리명왕은 하늘을 나는 꾀꼬리를 보면서 황조가를 지으며 자신의 허약한 왕권에 눈물 흘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유리명왕
삼국사기에는 첫째 아들 도절이 죽었다는 사실만 있으며 둘째 아들 해명은 유리명왕이 자결을 명령하여 스스로 자살하였으며, 넷째 아들 여진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위 19년 8월 나라의 제사에 제물로 쓰여질 돼지가 도망가게 되는데 돼지를 따라간 신하가 돼지 다리 힘줄을 잘라서 돼지를 잡아 온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리명왕은 돼지를 잡아 온 신하를 땅에 묻어 죽이지만, 한 달 후 자신이 죽인 신하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에 맏아들 태자 도절(都切)이 죽었다. 나라의 제사에 제물로 쓰여질 돼지가 도망갔다는 사실은 나라의 도읍을 옮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돼지를 도망가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환인에서 다른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겠다는 유리명왕의 계획은 돼지 다리 힘줄을 잘라 돼지가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한 신하들의 반대에 의해서 좌절되고, 이에 화가 난 유리명왕은 수도 이전에 반대한 신하를 죽이게 된다. 하지만 도읍 환인에 살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의 수도 이전 반대가 계속되자 유리명왕은 결국 한 달 만에 돼지 다리 힘줄을 자른 죄로 죽여버린 신하에게 공식 사과하면서 자신의 수도 이전 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그리고 4개월 후인 유리명왕 재위 20년 1월에 맏아들 태자 도절(都切)이 죽고 재위 22년 10월에 도읍을 환인에서 집안으로 옮기게 된다. 맏아들 도절(都切)의 이름은 한자로 해석하면 '도읍을 끊다'라는 의미이다. 도절(都切)이라는 이름은 수도 이전에 대한 찬반 세력의 다툼 과정에서 유리명왕의 맏아들 태자 도절(都切)이 희생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에 유리명왕은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이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네게 칼을 내리노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결하도록 하라"며 아들에게 자결하도록 명령하여, 태자 해명은 땅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자살하였다. 아마도 유리명왕은 옛날 도읍 환인에 있는 귀족들이 아들 해명과 연합하여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두려워 아들 해명과 환인의 귀족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만든 광개토대왕비에는 재위 시절 업적이 훌륭한 4명(추모왕·유리명왕·대무신왕·광개토대왕)의 왕을 비문에 새겼는데 그 중 1명인 유리명왕은 올바른 이치로서 세상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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