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토종 오가피 연구에 평생 바친 기인
동봉
2010. 8. 10. 20:51
토종 오가피 연구에 평생 바친 기인 | ||||||||||||||||||
김중규가 만난 사람-수신 오가피 성광수 사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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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토종 오가피」와 성광수 사장(60). 웬만한 사람이면 한번쯤은 보았음직한 말이다. 혹자(或者)는 촌(村)스런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그의 사진까지 기억할 수 있을런 지도 모른다. 생각을 되살리기가 힘든 사람이라도 '신문 광고'라는 말을 디밀면 금방 무릎을 치게 된다. 매일 낸 광고가 반복에서 오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거의 빠지지 않고 사진이 실린 신문 광고를 내고 있다.
성광수 사장. 나이 이순(耳順)에 무슨 꿍꿍이속으로 신문 광고만을 고집하고 있을까. 남들은 홈쇼핑을 통해 단숨에 상품을 알리는 대박 전략으로 쓰는 데 그는 왜 스테디 셀러(steady seller)에 승부를 걸었을까. 풍문으로 전해들은 소식, '오가피에 미친 사람'이라는 말은 더욱 '성광수'라는 인물에 궁금증을 더하게 만들었다. 약 두 달 전부터 지인(知人)을 통해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좀처럼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거의 잊혀져갈 무렵, 갑자기 답신이 왔다. 다음주 하루를 택해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게 2월 7일이었다. 그리고 닷새 후인 12일에 충남 천안시 수신면 해정리 오가피 농장에서 그를 만났다. 청교도 같은 삶으로 늘 필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남선기공 손종현 사장이 길동무였다. ″강의를 들었으면 됐죠. 그게 다 내 이력서요. 뭐가 궁금할 게 있어요.″ 조치원 전동에서 병천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성광수 오가피 농장'에서 만난 그는 대뜸 반어(反語)법으로 손님을 맞았다. 할 얘기가 많다는 뜻이리라. 마침 수요일이어서 설명회가 있는 날이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200여명의 오가피 재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다. 허름한 비닐하우스 속에 마련된 강의실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평소 한 시간이면 끝이 난다던 강의는 약 2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대담도 그제서야 시작되었다. ″2005년이 되어야 우리 것이 세계적인 오가피로 된다. 그 해부터 매년 1-2천만본씩을 심을 계획이다. 지금 토종 오가피가 최고로 되고 제대로 할 경우 2005년도에 묘목 3억본만 들여놓고 일본에 1조원을 꿔달라고 하지 뭐. 술도 2005년 상반기에 최하 150억-25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술공장과 대중주를 만들어질 때까지 50억원을 투자하면 하반기에는 100억원 어치를 판매할 수 있을 게다. 그리고 계속해서 광고에 투자를 해야지.″ 토종 오가피 세계화에 앞장 설 것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을 가다듬어 보니 성사장 사업에 2005년은 매우 의미가 있는 해인 것만은 확실했다. 말이 늘 그랬다. 쉽게 정리를 할 수 없었지만 오가피에 대한 신념과 사업 구상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갑자기 농림부장관 얘기가 나왔다. ″농림부 장관 김동태씨한테서 전화가 왔더라. '그 술이 제일 좋아' 하면서 술 먹어봤느냐는 전화를 했더라. 처음에는 술을 70도로 만들었지, 그런데 술은 좋은 데 너무 독하다고 해서 40도로 낮췄지.″ 술이라는 건 수신에서 나오는 오가피를 주정으로 해서 만든 토종 오가피주를 일컫는다. 한잔 권해주는 데 독주에서 나오는 특유의 냄새와 오가피 향이 함께 배어 나왔다. 술은 오가피 추출액에 이은 신규 사업을 위해 마련된 비장의 무기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또 오가피 와 관련한 말은 하지 않고 까치 잡는 얘기로 이어졌다. 까치 포획망을 개발했는데 기가 막히게 잘 잡혀 한전에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는 등이 화제였다. 그룹을 지어 사는 까치의 습성을 이용, 까치를 까치로 유인하는 전략으로 잡은 숫자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물망에 가보니 30-40마리가 망 속에 갇혀있었다. 오가피에 미친 그의 생활이나 까치를 잡는 집요한 노력, 그리고 대담 중간에 들려주는 일화 등은 기인(奇人)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터뷰는 본래의 목적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연유로 오가피와 인연을 맺었을까하는 궁금증이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형님은 간 질환, 안 사람은 관절염으로 고생을 했지. 그런데 우연히 오가피를 복용시켰더니 씻은 듯이 완치가 되어 그때부터 오가피 성능을 연구하게 되었지. 안타깝게도 토종 오가피는 많지 않았어. 그래서 섬 지방에 가서 겨우 몇 뿌리를 구해오기도 하고 직접 산 속에 가서 채집해오기도 했지. 한 그루 한 그루 모으면서 분근이라든가 휘묻이를 해 지금에 농장을 만들었다.″ 오가피로 질병 치료...약효에 매료당해
약 67만평에 달하는 천안 수신 농장에는 종류별 오가피와 배나무가 자라고 있다. 만경산 일대는 오가피 천국이라 할 만큼 다양한 종류가 심어져 있고 집중적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약 80,000평의 묘목장이 있고 132만평의 농장에 700만주의 오가피나무를 기르고 있다. 토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그는 한 전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오가피를 본격적으로 보급하고 저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많은 벽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이지만 시중에서 한 근에 3,000-4,000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오가피는 거의 독활이나 엄나무, 두릅입니다. 오가피로 둔갑하고 있지요. 요즘 들어서는 국산에 비해 효과가 형편없는 중국산이 국산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오가피 재배에 열중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물어보고 싶은 말은 있었다. 왜 얼굴 넣은 신문광고만을 고집하는 가 하는 것이었다. '방송광고를 해서 팔 물량이 없다'는 말로 가볍게 넘겼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해답이 안되었다.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겨우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 해 10월 국민일보와의 대담에서 밝힌 내용이다. ″나는 한갓 농부에 지나지 않지만 온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내 사진을 넣은 신문광고를 매일 싣고 있다. 나는 이 나라 최고의 부농이다. 앞으로 세계적인 농부가 될 것이다. 3년 후에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앞 다퉈 내게 달려온다. 국제 시장에서 우리 산물의 고부가가치와 경쟁력이 인정받을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국민들에게 내 얼굴을 알리고 있다.″
가끔씩 묻지도 않는 대답을 자주 했다. 이를테면 땅값이 자고 나면 올랐다는 말이라던가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데 빨리 마무리짓고 싶다는 등의 말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세무조사를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도 신기했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얘기하는 것이 그랬다. 그렇다면 그의 생활 자세는 어떨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자는 게 신조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면 되지. 그러면 누구를 만나도 편한거야. 감사하는 마음이 많다는 말이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후손들에게 좋은 세상을 남기는 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조상님들에게 떳떳하기 위해 생활을 하고 있지. 배짱껏 살면서 늦게 가는 게 좋은 일이야.″ 거침없는 말과 확신에 찬 태도 특이 성사장은 눈빛이 강하고 말이 거침이 없다는 게 특징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확신을 가지고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다소 황당해 보이는 얘기도 그의 입을 통하면 사실처럼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2007년 정도 되면 오가피가 폭락을 한다는 말이나 오가피 술로 전국을 제패하겠다는 말이 일례다. 아마 질경이 같았던 그의 인생 역정에서 나오는 분위기처럼 보였다.
성사장은 충남 연기 태생이다. 대전중을 나와 천안농고를 간 것부터 그의 이변인생은 시작되었다. 농고에서 서울대를 들어갔으니 학업에 대한 재능은 아주 뛰어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서울대를 그만둔다. 전적으로 학비문제 때문이었다. 군 입대와 제대, 쌀 다섯 말 값인 3,000원을 빌려서 무작정 상경, 서울 봉천동에서 목부(牧夫) 생활을 시작으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돈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지만 향학열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낮에는 소를 키우면서 매일 새벽 3시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 국세청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국세청에서 조사 2반장까지 지내고 그만둔 그는 1976년부터 땅을 사들여 되파는 수법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남들처럼 개발정보를 미리 빼내 투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산을 사서 농지로 개발해서 판다던가 부가가치를 만들어 되파는 수법으로 정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성사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땅 때문에 수난을 겪었다. 천안 수신면 일대에 사들여 조성한 오가피 농장과 함께 그가 구상 중이던 민속촌이 가시화 될 무렵 권력을 앞세운 대기업이 땅을 빼앗아가려고 했다. 정당하게 사들인 땅을 대기업에 팔 이유가 없다고 맞섰지만 역시 세무조사라는 엄청난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남은 땅을 추슬러 지금의 농장을 마련하긴 했지만 그 때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민속촌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앞으로 자동차 문화를 예측해서 한 일이야. 2000년에는 자동차만 1,000만대가 넘은 게 아닌가. 또, 주 5일제 근무로 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즐기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여기에 10만평 규모의 민속촌을 만들자는 구상을 하게 된 거지. 그런데 땅을 많이 빼았겼지. 팔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지.″ 민속촌 한방병원 건립으로 사업 완성
민속촌은 한방병원과 함께 오는 2004년에 착공할 예정이다. 현재 성광수 오가피 농장에서는 건강식품 '수신 토종 오가피'와 시험 생산중인 오가피 술을 만들고 있으며 2006년 생산을 목표로 기능성 식품과 생약 등 5가지 신제품을 개발 중에 있다. 오가피 약효는 월드컵 축구 한국 대표와 마라톤 선수, 그리고 태릉선수촌에 합숙 훈련중인 국가대표선수에게 장기적으로 공급해왔다는 점에서 객관화되고 있다. 특히 복용 후 2주 후부터 3분 동안 뛴 후 심장 박동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과거 3분대에서 1분대로 줄어들었다는 게 성사장의 주장이다. ″아직도 농부로 살고 있고 오가피에 미쳤지. 앞으로도 평생을 바쳐 오가피를 연구하려고 한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토종 오가피 효능이 널리 알려져 국민 모두가 건강해지고 세계에서 인삼보다 유명한 약용식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담 도중 그는 양해의 말도 없이 자리를 떠버렸다. 이날 설명회 참석자들이 농장을 견학한 후 질문을 받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뜨면 어떻하느냐는 말에 성사장은 '기사 나는 것보다 이 사람들이 내게는 더 중요해' 라며 말문을 막아버렸다. 약 2시간에 걸쳐 대담은 끝이 났다. 만경산 일대 농장을 돌아보는 도중, 안내자는 성사장을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침 일찍 일어나 일기를 쓰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로 볼 때 '매우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근접한 표현이라고 귀띔했다. (연락처) 011-9754-1182, 02-966-1181, (홈페이지)www.sksogapy.com/ |